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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Apr 18,


  남부순환로를 빠져나와 테헤란로로 마악 들어서던 때였다, 메뚜기 같은 지선버스가 내 앞에서 급정거를 하던 순간은. 빠-앙, 미국에 다녀온 후에 생긴 습관 중에 하나가 '되도록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였는데 누적된 피로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 어느새 내 손은 클랙슨을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버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우회전 전용으로 한차선인 까닭에 여지 없이 버스 뒤에 멍하니 서서 수분을 기다렸다.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눕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찰나, 난데 없이 시야가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깜-빡, 눈이 무겁다. 오른쪽 눈을 가려본다.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종일 렌즈를 끼고 있던 탓에, 만성 안구 건조증인 내 눈이 말 그대로 렌즈를 튕겨내버린 것이다. 주책맞게 힘이 좋은 각막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짧디 짧은 속눈썹에 간신히 매달린 렌즈를 집어 들어 거울을 내려 볼 사이도 없이 쑤셔 붙였다. 깜-빡, 렌즈가 눈에 일체화되려는 순간 그제서야 메뚜기가 움직인다. 나도 급히 차를 출발시킨다.

  2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며 흘끗 바라보니 버스 기사아저씨는 태평한 얼굴이다. 물리적인 고장 문제도, 버스 승객 내부 문제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원인 불명으로 버스가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스피드광인 나는 분명 테헤란로를 질주하다가 졸지에 시력을 잃고 어딘가에 처박혔을 것이다.

  멀쩡하게 살아가라는 어딘가의 계시였을까. 가벼운 사고라도 났으면 돌아오는 월요일을 피할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하는 나는 치졸하기 그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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