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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Feb 19, 바람이 분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온 몸으로 바람을 마주하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가락에 온기가 묻어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이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떨어진다.

  '덮은 책장을 다시 열어 처음부터 읽고, 또 읽고, 이 모든 것을 외워버릴 만큼 되풀이되는 세월을 보냈네요.'

  익숙하게 훔쳐내는 그녀의 슬픔 사이로 얼핏 보인 것은 희망이었다.

  '사실은 두려워요. 어쩌면 저는 결말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오랫만에 미소를 짓는 그녀, 떨리는 어깨를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 아시나요?'

  성인의 얼굴을 한 그녀의 모습 위로, 어린 소녀가 겹쳐 보인다.

  '나는 언제나 내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내 머릿속의 결말이 오답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눈에 불안이 스쳐 지나간다. 그 눈동자의 흔들림에서 처음으로 인간미를 느끼다.

  '나란 사람.. 참 어리석지 않나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사실 뿐인데도
  바라고 있어요. 유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란 존재에게. 영원을 말이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

  '그래요, 어쩌면 나는 지나칠 정도로 겁이 많은 위선자일수도 있어요.'

  두 손을 뻗어 하늘 높이 기지개를 켠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변하게 하는 존재가 생겼어요. 그리고 어쩌면-'

  갑자기 그녀가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다. 나는 왠지 갈증을 느낀다.

  '어쩌면.. 이것이 행복해지는 길 아닐까요?'

 

  나도 진심으로 답해주고 싶었다. 믿고, 나아가라고. 후회라는 놈 역시 행동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달고도 쓴 결실같은 것이라고.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미소 지을 수 있다면, 힘들고 지친 순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행복은 이미 당신과 함께라고.

  오랜 침묵을 깬 그녀의 발언이, 그 생사를 알리는 듯 간헐적인 비명이 되어 대기에 흩어질 때-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는다. 온기를 전한다. 그녀는 내가 되고, 나는 그녀가 되어 우리는 드디어 만나게 된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다름아닌, 나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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