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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Jul 18, 한 여름밤의 꿈-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공원, 작은 여자아이가 살금 살금 비둘기를 향해 걷고 있다. 자박거리는 서툰 발걸음 덕에, 비둘기들이 아이의 머리를 스치듯 날아 오른다. 놀란 아이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다. 아이가 울면서 나를 향해, 그 작은 손을 뻗는다. 달려간다. 눈물 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여자 아이는 내게 매달리듯 안긴다. 익숙한 무게, 아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이.

  남편은, 꼬물거리는 아이의 손이 그렇게 귀엽다며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더럽다며 눈을 흘기는 내게, 당신이 해주는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걸-이라고 미운 소리를 한다. 연애 시절에 그렇게 좋아하던 당신 향수보다, 나도 내 딸 살내음이 훨씬 좋거든?' 입을 삐죽이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인생의 그 어떤 정점에 올라서도, 항상 마음 깊이 미진하게 남아 있던 공허함이 채워진 것은 커리어도, 결혼도 아닌 우리 딸을 처음으로 품에 안았을 때였다. 나는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 살아왔다- 우습게도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집 안 어디에선가 딸아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내밀어보니, 그가 어제 퇴근길에 사온 머리끈으로 열심히 아이의 머리를 묶어보려 하고 있었다. 서툰 솜씨 탓에 아이의 이마로 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며, 그 작은 아이는 아빠의 허둥거리는 모습이 재미 있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지도록 소리내어 웃고 있다. 살금 살금 그의 뒤로 다가가 팔을 뻗어 남편의 등에 달려든다. 유독 간지러움을 많이 타는 그의 옆구리로 손을 밀어 넣는다. 딸아이도 제 어미를 따라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간지럽히는 시늉을 한다. 그것이 그렇게 귀여워 우리는 또 한바탕 웃고 만다. 결국, 아이에게 너무 무거운 머리끈은 역시나 남편의 서툰 솜씨로 내 머리에 묶이게 된다. 글을 쓰는 내내 머리칼이 하나 둘 흘러나와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마치, 당신이 곁에 있는 느낌인걸- 학교에서 한창 강의 중일 그를 생각하다가 마음을 추스린다. 마감이, 코앞이다.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한줄기 서늘함을 느낀다. 집안이, 너무 조용하다. 책상에서 일어난다. 반쯤 닫혀 있는 서재 문을 열고 아이 방으로 간다. 곱게 낮잠을 자던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좋아하는 인형까지 놓아둔 채로, 아이가 사라졌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어느새 눈물 범벅이 된 나는 그가 집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뛰쳐 나온다. 우리 딸아이 못봤나요, 지나가는 사람 모두를 붙잡고 늘어진다. 흩어진 머리칼이 땀에 흠뻑 젖어 얼굴에 달라붙는다. 저 멀리 남편이 뛰어오고 있다. 당신, 괜찮아? 그가 내 어깨를 잡는다. 문득, 발에 통증을 느끼며 내려다본다. 따스함이 느껴진다. 뒤돌아 보니, 골목이 온통 붉은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가장 아픔보다 더한 감각은 무한한 공포심. 딸아이가, 사라졌다.

 


  집안에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처음과 같은 자상한 모습으로, 날 대해준다. 아니, 오히려 그 빛나는 성품이 날 숨막히게 한다. 그의 배려가, 그의 태도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과거를 메우려 한다. 말수가 줄어든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을 떠올리게 한다. 지독히도 날 닮은 그 작은 아이를,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떠올릴 것이다. 나는 그를 피한다. 그도 나를 찾지 않는다. 그 날 이후로 딸아이의 방에서 잠드는게 습관이 되었다. 며칠 전 밤에는, 인기척에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아이의 옷장 서랍 앞에 서 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눈을 감는다. 아침에 일어나니,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것은 딸이 좋아하던 핑크색 레이스 양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무너진다.




 





  어두운 것을 유독 무서워하던 아이, 나는 그 아이를 혼자 둘 수 없다. 그의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남긴다. 이토록 잔인한 여자였나, 나란 사람은. 헛웃음이 난다. 아이의 침대에 기대어 잠든다. 내 손에는 딸아이의 인형이 닿아 있다. 결국, 나도 마지막은 혼자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사랑하는 내 딸의 달콤한 살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아아, 드디어 거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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