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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Jul 21, 껍데기-

 


  걷고 있는데, 내가 없다. 웃고 있는데, 내가 없다. 손에 들린 수저로 밥을 떠 넣으려는데, 받아 먹을 입이 없다. 내가 없다. 없다. 없어졌다. 이상한 일이다. 어느 순간,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작은 소용돌이를 남겨둔 채, 내가 사라졌다. 홀로 남은 껍데기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하게 된다. 언젠가 혹 돌아올지 모르는 영혼을 위해, 지치도록 움직이는 것은 썩지 않기 위함이다. 이 껍데기라는 놈은 지극히 단순하기 마련이라, 한 번 태엽을 감아주면 제 힘이 다할 때까지 삐걱거리며 괭이질을 한다. 밤이 가시고 아침이 오면, 내리쬐는 태양과 데워지는 대지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이마에 땀이 송글거린다. 흐르는 땀이 눈을 적셔도, 채 따가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비어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 되었다, 기계적으로 내리찍는 괭이 자루에 피가 스며든다. 밭을 간다. 돌을 고른다. 이랑을 만든다. 굳어가는 허리춤을 펴는 찰나, 하늘이 어두워지며 비가 쏟아진다. 마른 땅에 돌비가, 내린다. 이미 익숙하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고 처마 끝에서 비를 피하는 껍데기. 이것은 습관일 뿐이다, 실제로 첫 돌비에 뒤통수가 찢어진 껍데기는 아픔 조차 느끼지 못하여 벌어진 상처에 구더기가 꼬이도록 그렇게 열흘을 돌아다녔다 한다.

  괭이를 밭두렁에 세워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껍데기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본다. 작게 흔들거리던 별이, 긴 꼬리를 그리며 하늘에서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지기 직전, 껍데기는 그것을 보았다.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있었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그곳에는 우리가 있었다. 눈가에서 여느때처럼 뜨거운 땀이 아닌, 낯선 물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껍데기는 손가락을 들어 액체를 털어낸다. 낯설지 않은,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름을 느끼며 숨을 헐떡인다. 여러 줄기의 물이 정신 없이 양 볼을 타고 흐르다. 숨을 고르게 쉴 수 없어, 껍데기는 가슴을 부여 잡는다. 하지만 껍데기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자신이 흘리는 것이 눈물이라는 사실조차.

  초여름의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들썩이던 어깨가 점차 조용해지고, 얼굴에 흐르던 물이 바삭거리는 결정으로 변해간다. 껍데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흙투성이 손을 들어 툭툭, 털어낸다.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밭으로 향한다. 괭이를 잡지 않으면, 자신마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다.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지던, 그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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