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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move on이 필요한 시점..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나날. 극단적인 판단은 지극히 사양하는 바이나, 진실로 그러하다는 것은 왜곡할 수 없음이다. 근래에 일어난 일을 정리해보면 우선, 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살아온 강아지를 떠나 보내야만 했었고 취미와 특기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시작한 파트타임은 인간에 대한 실망과 불신감만을 남겼을 뿐이며 가장 의미 있게 사귀다가 결별한 한 남자는 어린 시절, 그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 단점들을 꽤 많이 보완하고 나타나서 데레데레한 삶을 살고 있다. 정직한 타인, 그것도 이성들에게.

  첫번째는, 그래도 아파했던 아이인데 억지로 고통스러운 육신에 묶어 두는 것 보다는 아프지 않은 좋은 곳으로 보낸 것이, 모두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다. 평소 '호상'이 어딨어-라고 외치고 살아왔던 나란 사람도 직접 현실에서 마주해보니 수긍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내가 보는 눈이 없었을 뿐이다. 한 지인은, 벤쳐에서 뭘 바래- 그런게 벤쳐야.라고 말해주었지만, 이념이야 어쨋든 가장 효율적인 매커니즘 속에서 평온할 수 있는 내 캐릭터가 그곳과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담당자였던 그 사람의 자질 부족이라던가, 개념이 틀려먹었다-라는 점도 감안해 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두가지 모두 원인이었다고 생각. 마지막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헤어지고 친구로 남지 않는 법을 택하는'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헤어지고도 친구로 잘 지내는 친구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때 사귀었던 감정 자체가 연인이라기보다는 친한 이성 친구-였기 때문에 편하게 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만은 내게 그렇지 못한 모양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어린 나이에 힘들게 장거리 연애를 유지해가며 따뜻한 말 한마디 바란 것이 그렇게 잘못이었나 매일 밤을 울며 서서히 시들어가다 이별을 선고해버린 내 심정은,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SNS라는 온라인 특성상, 모르는 사람에게도 훈훈하게 듣기 좋은 말을 챙겨주는 것을 보고 있자니 '대체 넌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로구나.'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때는 왜 그렇게 못했을까'라는 원망까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은 막기가 힘들더라. 사람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성장'하는 것이겠지. 혹은 '퇴화'도 있겠지만.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나같이 상처투성이로 제자리에 주저 앉는 사람은 외롭다 말할 자격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사람에 대한 원망스러움이 묻어 나는 삶 속에서는 당분간 웃을 일이 없을 지도 모르겠다.



  move on이 필요한 시점..
  이제 남은 것은 내 선택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