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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넷의 여자사람

소년이여, 시인이 되어라.

  밖으로 나온 것은, 23시간 하고도 24분 여의 일이었다. 집 앞 카페를 목적지로 챙겨든 것은 한 개의 결제 수단과 두 개의 전자기기. 메뉴를 묻는 여자에게, 위에서 다섯번째의 여섯자리 커피요-라고 답한 것은, 방탈출 셀프미션을 완수한 업적(23시간 24분 만에-)에 대한 기념비적인 선택이었다. 분명 카페 방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앞서 말한 미션과 밀려있는 업무를 위한 환경 조성에의 의지. 하지만 이 결연한 의지는 카페 구석에 앉아 노트에 펜을 끄적이던 남자에 의해 변모되고 마는데..

  그는 16~17살 남짓,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되었을까 싶은 소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카페 안에 존재하는 3번째 인간에 불과했으나, 오렌지비앙코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간 주인 여자와의 대화 속에서 그는- 절망적인 단어에 대해 고민중인, 시를 쓰는, 서점에 가고 싶었으나 토요일이라 문을 일찍 닫아서 가지 못한, 고등학생이 되었다. "침몰하다, 침전하다, 또 뭐가 있을까요? 더 빨리 가라앉는 느낌의, 절망적인 단어는요." 주인 여자는 소년 앞에 앉아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고 나 또한 어느새 엑셀 위 깜빡이던 커서를 잊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 또한 저렇게 단어 하나에 목숨 걸던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보다 소설을 즐겨썼던 이유는, 재해석을 통해 정의하는 단어의 나열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뱉어내는 문장의 집합이 좋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내 나이 반 정도가 되는 녀석에게 도발당해 블로그에 로그인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다니, 나도 아직 이쪽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구나.

  소년이여, 시인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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