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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Apr 6


  운동을 하는 내내 퍼렇게 질려 있었던 것은 분명, 장꼬임의 복선이었을 것이다. 힘찬 트레이너와 나는 마치 스머프 같다며 웃어 넘겼지만 장의 연동 작용은 그때부터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나보다. 절정은,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앉아 엄마와 회사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였다. 제 3자처럼 담담하게,(내 감정을 실을수록 엄마의 걱정 지수가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깔끔한 결말을 위한 화려한 레시피를 읊어가듯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며 브리핑을 마쳤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정직할 수 없는 내 장은 시위라도 하듯 파업을 선언한다. 눌러서 딱딱한 이 복부가 근육으로 인한 그것이면 참 반가우련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엄마도 알고 힘찬이도 안다. 이리 저리 눌러대며 외부의 힘을 빌어 연동 운동에 시동을 걸어보려 해도 주인을 따라 무식하게 강직한 이놈의 장은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사실, 그것이 맞다. 엄마손 약손, 소화제 두알, 지금 당장은 도움이 될 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강남의 한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것이 이쪽의 현실이다. 특출나게 좋지도, 그렇지만 나쁘지도 않은 이대라는 학벌과 이런저런 경력을 가지고 3월 공채를 기다리지 않은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나 오늘부터 출근 안해.'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란 사람은 대량 생산의 반열에 서기에는 자존감이 강했으며 세명 이상이 모이면 시작되는 정치 싸움에서 스스로 방어하기엔 너무나 예민한 신경의 소유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3주라는 짧은 취업 활동을 하며 페이가 마음에 드는 대기업과 현재 다니게 된 회사를 두고 최종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용의 꼬리가 되느냐, 뱀의 머리가 되느냐-로 귀결되는 문제는 아니었으나 제주 은갈치의 꼬리 부분이 되느냐 가운데 토막이 되느냐 정도의 문제임엔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몸통을 택했다. 보다 치열하게 일을 배우고, 많이 울고 웃으며 자기 계발을 하고 싶었다. 감히 내가 크게 키우겠습니다'라고 하기에는 전문성 떨어지는 평범한 인문학도에 불과했지만 정말 내 자신과 함께 이 회사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라는 애정에 기반해 입사를 결심했다. 면접 당일날로 돌아가면, 본부장님께 반했던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지도. 30대 초반으로 보이나 경력과 직함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분명 마흔은 넘으셨을, 그 누가 봐도 벤처 회사의 브레인으로 보이는 본부장님과 한시간 동안의 이야기 끝에 나는 다음주부터 이 회사에 출근하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가히, 인연이었다. 헤드헌터의 전화가 처음도 아니었는데 이 회사와 연결해주신 그 분의 전화는 왠지 쉽게 거절할 수 없더라. 그렇게 나는 이 회사를 알고, 한 배를 탔다. 자유로움을, 무한한 열정을 꿈꾸며 흔쾌히 닻을 올렸다. 그러나 두달이 지나가는 요즈음, 현실은 시궁창이다. 유린당한 로얄티는 젊은 패기까지 앗아갔으며 아침 출근길 걸음 걸음은 피묻은 가시밭이다.

  For what? 나는 절규한다, 굳은 장을 부여잡고.

  눈치를 살피다 살짝 늦은 퇴근을 하고 회사에서부터 휘트니스 센터까지 뛸 수 있는 구간은 모조리 뛰었다, 8시로 예약된 PT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고 퇴근 시간부터 내가 중요한 업무를 했느냐?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때의 나는 이미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 즈음이면 출발해야 도착해서 싸이클로 워밍업을 할텐데'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결론은- 턱에 차오르는 숨과, 정시 도착이라는 성과와, 가장 좋아하는 스카프를 미친듯이 뛰던 저 구간 어딘가에서 분실했음을 뒤늦게야 알게 된 정도가 되겠다.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좋아하는 생일이라는 연중행사를 하루에 몇 번이나 잊을 정도로(왜 연락도 뜸하던 친구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들을 하는지 어제서야 알았다.) 정신이라곤 차릴 수 없는 체험 삶의 현장. 나는 분명 지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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