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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Jul 19, 동반. 달빛이 일렁이는 물결 속으로 발을 집어 넣는다. 새하얀 살결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그네들의 저항.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들어 올린다. 잡아 올린 치마 끝이 처덕거리며 물결에 닿는 순간, 손을 놓아버린다. 허벅지에 감겨 오는 치마가, 누군가의 미련처럼 그렇게 버겁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납작한 곡선을 그리는 배를 간지럽히는 파도. 휘저으며 앞으로 나가는 양 손에는 어느새 푸른 해초가 걸려온다. 나아간다. 거친 바다는 봉긋한 가슴마저 삼켜 버린다. 걷는다. 턱을 간지럽히는 물결. 헐떡거리며 삼키는 숨 사이로 짠맛이 느껴진다. 이윽고, 더이상 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밤이구나. 나는 느낀다. 사라져가는 나를, 그가 지켜 보고 있다. 그의.. 더보기
Jul 18, 한 여름밤의 꿈-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의 공원, 작은 여자아이가 살금 살금 비둘기를 향해 걷고 있다. 자박거리는 서툰 발걸음 덕에, 비둘기들이 아이의 머리를 스치듯 날아 오른다. 놀란 아이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선다. 아이가 울면서 나를 향해, 그 작은 손을 뻗는다. 달려간다. 눈물 범벅이 된 아이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여자 아이는 내게 매달리듯 안긴다. 익숙한 무게, 아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이. 남편은, 꼬물거리는 아이의 손이 그렇게 귀엽다며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더럽다며 눈을 흘기는 내게, 당신이 해주는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걸-이라고 미운 소리를 한다. 연애 시절에 그렇게 좋아하던 당신 향수보다, 나도 내 딸 살내음이 훨씬 좋거든?' 입을 삐죽이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 더보기
Jul 13, 매력적인 dead end- 기억해줘-라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도는 것을 보니 나란 사람, 참 이리도 유약하기 그지 없다. 내게 있어 미련이라 함은,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잊게 되는 것이 전부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러하다. 미약한 인간에 불과한 오만한 사람인 것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미미하게 줄어들다가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는 것. 천천히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 만큼- 이 얼마나 매력적인 dead end란 말이던가. 한숨이 잦아진다. 더보기
Jul 10, 연애를 못하는 이유- '잊지 못하는 거네요?' 잊어야 하는건가요, 잊지 않으면 안되는건가요, 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나요- '그것이, 다음 사람에 대한 일종의 예의 아닐까요.' 저는 만났던 사람-들을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소중한 존재였던 상대방과 교감했던 그 시간은 분명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깊이 만큼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니까요. 그래서 절연하듯, 지우는 일은 불가능한 일임과 동시에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겠구요. 또한 내가 그렇듯, 상대방의 과거도 존중합니다. 아아, 이 부분이랑 잊고, 잊지 않고는 다르다는것 물론 알아요. 솔직히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는 말, 진심에 의한 자의든 배려 차원의 타의든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바에요. 하지만 저는 그래요. 마음에 너무나 깊히 .. 더보기
Jun 8, 오래 살아. 빠르게 흘러간다. 이리저리 세상을 둘러보며 느리게 걷고 싶어도, 이를 내버려두지 않는 인생을 원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집어지는 감정이란 놈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떨쳐낼 수 없는 과거, 품고 가야 할 기억. 헐떡거리는 것은 몹쓸 심장 때문만은 아니겠다. 하루를 보내도 이틀처럼 살며,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나란 사람의 일상에 네가 다시금 뛰어 들어오다. 훌쩍 떠나가던 그 순간처럼 불쑥 찾아온 너는 비틀거리는 내 앞에 한 웅큼의 피를 토해놓고 뒤돌아 걸어간다. 나는 너를 잡을 수 없다. 너도 알고 있으리라. 나는 가장 오래된 친구인 너를 잃었지만 너는 네가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인생에서 떠나가는 너를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우정이란 미.. 더보기
Jun 7, 양립과 공존 사이- '양립까지는 좀 그렇고.' 그러면 공존-정도로 해둘까? '그래, 그정도.' 몇 달만에 메신저로 물꼬를 튼 절친이라는 이름의 두 청춘남녀는 오랫동안 쌓여 있었던 자신들의 근황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 여자는 자신의 생활과 연애를 평행선상에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말아먹기 일쑤다-라는 한탄을 하고 그나마 공존-정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남자는 그것도 다 소용 없는 일이라며 한숨을 쉰다. '알파걸은 외로운 법이야.'라는 남자의 말에, 알파걸이 되어 외로우면 그나마 위안이라도 되는거지. 이건 뭐 베타걸 수준인걸- 여자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녀는, 무언가 감정이 요동칠만한, 기쁘거나 괴롭거나 인생에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순간이 오면 그때 만큼은 그렇게 혼자인 내 자신이 작아 보인다고 중얼거린다. 남자는 .. 더보기
Jun 4, 잊지 못하는 원죄- 나는 나라는 존재가 너란 사람에게 행복을 전해주었다 생각했다. 나로 인해 네가 한 번 더 미소짓고 세상을 아름답다 생각하며 그 무엇보다,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감히 자신했어. 그래서 네가 삼키고 삼키다가 '나와 만나보지 않을래요-'라는 말을 건넸을 때, 나는 '아, 이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고 싶다. 느끼게 해주고 싶어.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만은 그 누구도 아닌 네가 가르쳐준 셈이었지, 너의 눈빛,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나와 함께인 순간에 즐거움으로 가득했으니. 하지만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알게 된다. 네게 사랑을 베풀던 내가, 행복을 전해주었다 생각한 내가 너 없이는 진심으로 웃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보기
Jun 2, 아침이 두려운 이유, 아픈 날은 유난히 팔이 저리다. 물건을 잘 떨어뜨리는 행동이 단순한 부주의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되기 전까지 나는 헛되이 자신을 탓했었다. 아침에 일어나며 고른 호흡에 감사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람은 쥐어짜듯 저려오는 익숙한 통증에 몸을 둥글게 말고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그저 기다리기도 한다. 이불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는 아침을 보내고 나면 그 날 하루는 왜 그리도 길게만 느껴지는지. 지하철 계단 하나 올라가는 것이 못내 힘겨워 커다란 가방을 메고 망연자실, 올려다 본 적도 있었다. 마침 출근 중이던 그가 허옇게 질린 나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들다시피 하고 성큼 성큼 계단을 올라가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먼저 이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보기
Jul 1, 피폐함 혹은 그 무엇- photo by hs, NYC에서 사진 학교에 다니며. 주말이면 met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flea market에서 오래된 카메라들과 인사하며. habana에서 콘을 뜯으며 마일드한 커피를 마시고. 센트럴 파크 건너편 작은 까페의 게이 서빙맨에도 익숙해지고 싶었는데. 그런 나날을 꿈꾸던 내가 있었는데. 요리를 배우고 싶고, 소소한 인테리어에 관심이 가고. 작은 소품들이 눈에 들어오며 클래식 비틀에 마음이 가는 날 보니. 3년 정도 후에는 그대 손을 잡고 런던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 앞에 서서. 이곳이 바로 내가 10차선 무단횡단을 했던 곳이야(웃음)'라는 대사를 하는 내가 있을 것도 같다. - Jul 2007 잘 짜여진 루틴에 길들여져 칼퇴근에 꼬리 흔들고 주말에는 실내복을 벗기 싫어하는 3년 후의 내.. 더보기
Jun 25, 마음은 이미- 톡-톡, 손톱이 튄다. 쥐가 주워먹으면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옛말이 뇌리를 스치기도 하지만, 어느새 밤이 아니면 손톱 하나 깎을 여유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여자다. 불과 며칠 전이다, 손이 참 예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그 때 여자는 결심했다, 손끝이 뭉툭한 초등학생 손으로 돌아가야지. 분홍색 살이 부어 오를 정도로 손톱을 짧게 깎아놓는다. 여간 아프지 않다, 아린 손가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그러면서도 하나, 또 하나. 이윽고 성인 여자의 손은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돌아간다. 화장을 하지 않는다. 힐보다 플랫을 선호한다. 네일 아트보다 손톱깍기를 더 신뢰한다. 옷장에 있는 옷을 순서대로 걸칠 뿐이다. 때로 사람들은 묻는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꾸미는 즐거움'을 왜 누리지 못하는 것인가." 나는 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