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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여자사람

Jun 20, the ring- 그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테이블 위에 가만히 내려놓더니, 내 앞으로 살짝 밀어주는 그 손길이 마냥 수줍다. 우리, 오늘 처음 만났는데요? 그가 웃는다. 열어봐요- 목소리조차 낯설다. 반지가 두개, 고개를 내민다. 그를 바라본다. 그가 입을 연다. '나는요, 단비씨를 알아가고 싶고, 차츰 알아가게 될 거에요. 그런데 이게 왠지 맞는 수순 같아서.' 애꿎은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던 그. 다시금 입을 연다. '모두 단비씨한테 맡길게요. 누구에게, 언제, 왜, 묻지 않을게요.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답을 알고 있으니까요.' 눈이 마주친다. 진심이 담긴 눈. 나는 반지를 꺼내든다. 마치 거짓말처럼, 손가락에 잘 맞는다. 그리고 남은 하나를 들어- 새벽녘, 꿈을 꾸었다. 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더보기
Jun 18, 넣어둬- 넣어둬. photo by hs, 살면서 더러운 일은 참 많다. (평소 입은 걸걸한 편이지만 의외로 하드한 단어들은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 단어를 쓰는 내 자신조차 오염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은 예외로 하자.) 하지만 가장 더러운 것은, 무시하기 힘든 정도의 부당함이 따지고 보면 나라는 사람의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경우이다. 싸이코같은 군대 고참이든, 젠틀한 직장 상사든, 평소에는 한없이 상냥하고 예쁜 여자 친구든, 나와 연계되어 있는 그 깊이 만큼 그들의 행동은 내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라는 의문은 닥치고 넣어둬야 서로에게 좋다. 어찌 되었든, 더럽고 치사한 이 어떤 순간은 곧 지나가는 정점이기 마련이고, 점들이 이어져 선으로 구현되는 현실에서의.. 더보기
Jun 17, 대한민국 화이팅 :D 찍-찍찍찍! 그리스전 당시 잘 놀고 나서 한 장 찍혀있는 사진을 보니 왠지 누구씨가 생각나여 오늘은 냥이 머리띠를 들고 나왔다는. (어떤 팔로워분의 요청이 있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겸사겸사, 지금 가방 안에는 붉은 티 하나와 냥이 머리띠가 들어 있는 것이고, 퇴근 시간은 30여분이 남았으며 타 부서의 워크샵으로 인해 회사는 전체적으로 한산한 편. 이거 잘하면 정시 퇴근도 가능하겠다 싶은데 아뿔싸, 오늘 목적지는 강남에서 멀리 떨어진 홍대가 아니었던가. 친구 녀석들은 왜 이리도 홍대를 좋아하는지. 그래도 몇 년 만에 뭉치는 친구들을 생각하니 피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거니와 4년 후에는 어떠한 사정으로 월드컵을 못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 하에 지친 발걸음을 홍대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 녀석들, 기분파.. 더보기
Jun 16, 외로움의 이유- 마음이 맞는,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하고 싶은, 이야기가 즐거운, 그런 존재가 절실했다. 발전할 수 있는, 성장 가능한, 도움이 되는, 둘이 모여 이백이 되는, 그런 관계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대가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야말로 베스트. 나를 이끌어주는 멘토? 적절하다. 80대 노파든 10살 먹은 어린아이든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현상학적인 외형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 나름의 매력이 있으므로 끌리게 된다면, 본질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에 있으리오. 가슴 속 불이 뜨겁다. 이를 타오르게 할 한웅큼의 산소를 그저 기다리며, 그 기다림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 나아가고 싶다. 나아가, 만나고 싶다. 70억명이 살아가는 이 한 세상,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우리는 왜 이토록 외로운걸까. 그것은 바로 70억개의 .. 더보기
Jun 15, 살자꾸나, 오래도록.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자 기분이 고조된다. 볼은 홍조를 띄고, 고무된 판단력은 하늘 끝까지 날아 올라,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벅차다. 바쁘게 돌아가는 이 내 삶이, 잠이 부족하다 시간이 없다 투덜거리기 마련이어도 결국에는, 내가 좋으니 영위하는 것 아니던가. 해야 하기 때문에, 응당 주어진 일이므로, 거절하기 미안해서, 왠지 정답인 것 같으니까- 위와 같은 이유로 하기 싫은 일을 진행할 만큼 호인은 아닌 것이다 나란 사람. 유난한 기분파에, 단순무식한 성향을 지닌 여자 사람은 달아오른 술기운에 쌩긋, 웃어본다. 작년 겨울,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며 '다시는 연애따위, 하지 못할꺼야.'를 되새김질하던 기억에, 이제 그러한 감성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자신에게 .. 더보기
Jun 12, 누군가가- 누군가가 물었다. 왜 그러한 글만 쓰느냐고. 나는 되물는다. 어떠한 글이 결여되었냐고. 그가 다시 말한다. 슬프고 아프고 괴로움이 묻어나는 글말고 다른 글을 써본 적이 있느냐고. 행복한 시절에는 그 감정에 빠져 사느라 글을 쓸 여력 따위는 없다고 말하면서 문득 블로그를 시작한 이후로 내리 두 달 동안 꾸준히 포스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네가 우울해하는 바람에 이틀 내내 비가 내렸다고. 지금은 왜 또 이렇게 비가 한바탕 쏟아지냐며, 투덜거림이 섞인 타박을 한다. 나는 말한다. 나야말로, 비가 내리던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 비에 취해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고. 1년 반 동안 가슴 속에 담아둔 그 한마디를, 누군가에게 내뱉고 말았다고. 더이상 .. 더보기
June 11, 그리스전 photo by hs, 두근거림일까, 두근거림일지도. 아주 오랫만에 나는 출근길 햇살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2002년, 수천 명 군중 속에서의 길거리 응원전. 2006년, xx일보 인턴으로써 현장 취재, 그리고 2010년. 직장인이 된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떤 모습으로 한국을 응원하고 있을까. 선물 받은 응원용 빨간 티셔츠는, '답답한 라운드, 나를 찢어주세요.'라며 방에 걸려있는데, 당췌 옷에 손을 대본 일이 없는 나로써는 가위를 들었다가 덜덜덜 손을 떨고 내려놓은 상태.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응원 파티들은 축구 오덕 여자사람을 향해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스포츠 경기를 보면 유독 입이 험해지는 여자사람은 집안에서 이미 '호감 있는 남자랑은 절대 경기 응원을 하지 말것-'이라는 미션을 받.. 더보기
Jun 9, 객사 서서히 엄습하는 이별의 그림자에 익숙해지는 것도 해볼만 하다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줄어드는 연락 횟수, 잊혀지는 만남, 내비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서운함, 아픈 마음, 끝이 보이기에 끄집어 낼 이유조차 없는 아쉬움, 서로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쳐버린 탓에 그저 외면하고 마는, 아웅다웅 싸움조차 없는 까닭은 사그러든 마음 탓이오, 교집합 없는 서로의 삶에 익숙하다는 것은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겠지요. 구하려 하지 않는 자, 얻을 자격도 없음이외다.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두어시간즈음 두서 없이도 대화의 이어짐이 가능한 아이폰의 트위터, 메일, 포스퀘어, 카카오톡, 문자로부터 내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진작에 타클라마칸에서 객사라도 한 모양입니다. 대단한 사람 찾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옛.. 더보기
Jun 2, 그렇게 삶을 살아가다 그 어느 순간의 정점으로부터 '무뎌지는 것'이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연애의 카테고리에 접목된다면 '질투 하나 없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21세기의 카사노바'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폭넓은 인간관계에 적용된다면 요며칠 겪은 일과 같이, '어? 안녕하세요. 단비님 아니세요?'라는 인사에 '아..죄송하지만 누구신지요-'라는 실례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에 대한 정당함으로 자리매김되겠다. 비지니스 및 서비스 이용에 대한 부분에서라면, 내 속을 들끓일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며 출발 신호에 늦게 반응하는 앞차에 대한 답답함도 익숙하게 자제할 수 있게 된다. 대충 살펴본다고 해도 (적어도 나에게는)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겠다 하겠다.. 더보기
May 31, 화장 못하는 여자. 어린 날에는 이런 셀프도 찍었었구나- 밤새 춥다 추워, 연신 몸을 웅크리며 자다 일어난 계기는, 불똥이 무릎에 떨어져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화상을 입은 꿈이었다. 어쿠쿠, 벌떡 일어난 나는 오른손으로 연신 무릎을 쓸어내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부슬거리는 아침비가 내리고 있었고 옷을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서니 초췌한 직장인이 서 있더라. 며칠 전, M PD와 이야기했던 탓도 있고 뭔가 썬블락과 비비크림만으로는 매너가 아니다 싶은 나이가 되었다고 (이제라도)판단, 얼굴에 색을 넣을 색조 화장품을 찾아 화장대를 뒤적거렸다. 화장대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수분 크림, 두가지 종류의 썬블락, 비비크림, 엄마의 손등로션으로 전락하기만을 기다리는 새것이나 다름 없는 아이크림이 전부였다. 서랍을 연다. 데구르르, 니베아.. 더보기